2020. 4. 17. 21:24ㆍLandscape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죽음이 예언되어 있었다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어.” 안평대군이 말했다.
‘대군의 꿈을 제가 그리란 말씀이시옵니까?’ 하려다가 안견은 입을 다물었다.
안평대군의 얼굴 위를 설핏 지나가는 어둠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견은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들떠서 무릉도원을 얘기하던 사람한테 그 어둠은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헛것을 보았으리라.....
“그리하겠습니다.”
안견은 몹쓸 생각에 사로잡혔던 스스로를 부인하듯 결기를 담아 대답했다.
스물아홉 한창 나이가 아닌가 대군같은 사람에게 어둠이라니.....
안견이 일어섰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몸을 돌려 막 방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등 뒤에서 안평대군이 꿈에 취한 듯 몇 마디 더듬거렸다.
“이상한 일이로다.
하고많은 사람들이 내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거늘 꿈속에서는 어찌 두어 사람만 동행하게 되었을고....."
신음처럼 내뱉은 그 말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었음을 안평대군은 알지 못하였다.
(1447년 음력 4월 20일)
다음날이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그대가 마치 꿈을 꾼 것 같구먼…. 어찌 이리 정확하게 그렸단 말인가. 역시 그대는 신필(神筆)이야.”
안평대군은 벌써 몇 차례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을 계속 피어있는 꽃이 없는 것처럼 안평대군의 삶의 꽃도 오래가지 못했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둘째형인 수양대군과의 정쟁에서 꺾여 서른다섯 해를 마지막으로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속절없이 생짜로 떨어질 사람이 어찌하여 화려한 꿈을 꾸었던고.
그가 꿈꾸었던 무릉도원 같은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이 지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까.
하고많은 꽃 중에 굳이 복숭아꽃을 보게 된 것도 안평대군의 몽상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꽃잎 위에 구르는 이슬만 먹고 살기에는 안평대군의 꿈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냉철한 이성을 지닌 수양대군의 눈에는 안평대군의 풍류야말로
나라 말아먹기에 딱 좋은 풍류가의 작태로밖에 판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꿈만 꾸는 동생이
반석 위에 올려놓은 왕조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리라.
한 사람의 헛된 꿈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 그 죄는 죽어 마땅했다.
이것이 바로 안평대군이 꿈속에 노닐던 복숭아꽃밭에서 숨을 거둔 이유였다.
안견에게 복숭아꽃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꽃밭이 바로 자신의 ‘수목장(樹木葬)’을 치르게 될 장소라는 것을 안평대군은 알지 못했다.
뇌쇄적인 꽃잎이 자신의 주검을 덮어줄 명정(銘旌)이라는 것을.
‘몽유도원도’를 보고 찬탄의 시를 썼던 사람들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정적을 처단하던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는 안평대군의 사후에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정인지와 신숙주는 수양대군 편에 서서 승리자의 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조금만 날씨가 더워도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을 일컬어 ‘숙주나물’이라고 비아냥거리게 된 내력도
신숙주 같은 변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나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오늘밤은 또 무슨 꿈을 꿀까.
나의 꿈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꿈인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꿈인가.
나를 무너뜨리는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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